
– 아니 이게 뭐야?
– 제 생활기록부인데요.
– 아니 그건 아는데, 뭐가 이리 두꺼워.
그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두툼한 생활기록부였다. 마치 학교 선생님들이 누가 가장 많이 쓰는지 내기라고 하신 것처럼 한정된 공간을 작은 활자로 가득 채워놓으셨다.
이렇게 ‘협조적인’ 생활기록부는 처음이었다. 학생회 임원은커녕 그 흔한 반장, 부반장을 한 번도 하지 않은 학생의 생활기록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잠시 놀라긴 했지만, 내가 환선(가명)이의 학교 선생님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단지 환선이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어서가 아니다. 환선이는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그리고 더 나아가 상황을 부드럽게 해주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이 생활기록부는 그 증거인 셈이다.
보통 선생님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학생과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학생은 다르기 마련인데 환선이는 이 두 그룹 모두에게서 사랑받고 있었다. 주변 친구들한테 짓궂은 장난 한 번 친 적이 없었고 나에게는 항상 예의 있게 행동했지만 그렇다고 순종적이거나 무비판적이진 않았다.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고 자신 있게 내비쳤다. 동시에 다른 친구들의 상반된 주장도 경청하며 반응해 주었다. 어쩌면 그러한 모습 때문에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았음에도 주변 친구들은 환선이를 챙겨주고 아껴주었다. 자기들끼리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환선이가 조용히 무슨 말이라도 꺼내면 모두들 하던 말을 멈췄다.
그래도 아주 가끔 환선이가 숙제를 안 해올 때가 있었는데, (사실 엄청난 숙제의 양을 봤을 때 단 한 번도 숙제를 거르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다) 그럴 때면 “숙제 왜 안 했어?”라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본인이 숙제를 왜 안 했는지를 설명하고(다른 많은 아이들도 이 정도는 한다) 못한 숙제는 남아서 하고 가겠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쉽지 않다)
환선이가 특목고에 진학하려고 했을 당시, 자기소개서에는 학업적인 부분 뿐만 아니라 예체능에도 소질이 있는 그런 ‘이미지’를 넣어야 하는 유행(?)이 있었다. 공부도 물론 잘하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얼마나 바람직하게 해소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학생의 건전한 여가활동 여부를 확인해 보려는 이유였을 것이다. 집 떠나와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니 자기관리를 잘 하는 학생을 원했을 터이다.
하지만 환선이에게 딱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환선이의 몸무게가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과체중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먹는 거 좋아하고 움직이는 거 싫어하는 그런 전형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면접에서 자칫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부분이었다. 성적과 생활기록부로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환선이가 진학하고자 하는 고등학교에 전화를 걸어 문의를 해보았다. 마침 그 학교 교감 선생님께서 응해주셨다. 성적과 다른 기타 사항들을 봤을 때, 거의 완벽에 가까운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의 엄청난 몸무게가 면접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지 물었다.
결론은, 그럴 수도 있다는 거였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웠지만 불쾌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말을 듣고는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대를 하며 전화를 한 내가 너무 순진한 거였나. 교감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과체중이라는 건 자기 관리에 소홀하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 이참에 운동을 좀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조언’을 주셨다. 다만 몇 kg이라도 감량을 해서 본인의 의지를 보여주면 오히려 더 나은 평가를 받지 않겠냐며.
환선이를 만나 교감 선생님과의 통화한 이야기를 전했다. 환선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선생님, 지금이라도 운동을 좀 할까요?
– 운동이 나쁜 건 아니니까 하면 어떻게든 도움은 되겠지. 근데 너 운동 좋아해?
– 아니요.
– 그런데 하라면 할 수도 있는 거야?
– 누가 시켜서 하는 건 좀 안 내키네요. 그 학교는 지금 저의 몸무게를 보고 저를 판단하겠다는 거죠?
– 에이, 설마 꼭 그러기야 하겠어.
– 그렇죠? 그럼 살을 안 빼도 당락에는 크게 영향을 주지 않겠죠?
– 아, 그게 그렇게 되나?
환선이의 전략은 이랬다.
만약 합격하면 그 학교는 좋은 학교인 것이다. 학생의 외모보다는 학생의 능력과 잠재력을 알아본 것이니까. 그러니까 열심히 즐겁게 다니면 된다. 하지만 만약 떨어진다면 그런 학교는 안다니는 게 맞다. 그렇게 아쉽지 않을 것이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하지만 환선이는 단 하루도 그 일로 좌절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었다.
금세 플랜 B를 만들어 일반고에 진학했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道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얼마 전에 만나서는 영어선생님이 될 거라는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